양권모 정치·국제 에디터

 


돌이켜 보건대 지난 4월에 치러진 총선, 새누리당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경제민주화론, 경제민주화 깃발에 힘입은 바 컸다. 아무리 한나라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로고를 바꾸고, 당 색깔을 빨간색으로 도배했어도 경제민주화의 깃발이 없었으면 그 ‘바꾸기’는 궁지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의 포장술에 불과했을 것이다. 한데 시대정신으로 대두된 경제민주화를 정강정책의 핵심으로 세우고, ‘경제민주화의 원조’를 주장하는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해서 그 변화가 단순한 포장이 아님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새누리당은 ‘도로 한나라당’이 아니고, 박근혜는 ‘이명박근혜’가 아니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데 경제민주화의 기치는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다.


실제론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실질의 정책은 별로 제시된 것이 없었음에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의 논쟁적 발언, 다분히 의도된 경제민주화 논전을 통해서만으로도 경제민주화는 ‘박근혜의 상품’이 되었다.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 영역에서 우위를 확보했기에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야당을 과거의 세력으로 규정, ‘과거 대 미래’의 대결로 선거 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게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실패로 인해 더욱이 절박한 과제가 된 경제민주화를 새누리당이 선점함으로써 여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총선의 기본 기제마저도 약화시켰다.


 그렇게 경제민주화에 대한 시대적 요청과 대중의 열망을 확인했기에 박 후보는 3개월 전 대선 출마 선언 때 국민 행복의 길을 열어갈 첫 번째 과제로 경제민주화를 제시했을 터이다. 경제주체 간 격차, 효율성의 지나친 강조, 공공성의 중요성 간과, 불균형 심화 등을 거론하면서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은 시대적 과제”라고 약속했을 것이다. 5년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성장과 시장 중심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치를 세운다)’를 내세웠던 것과 비교하면 가히 존재론적 전환으로까지 보일 만했다.


박 후보는 대통령 선거 출마에서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를 전면화함으로써 재벌친화 시장만능의 이명박 정부 실패와 선명히 선을 그었다. 총선에 이어서 박근혜의 집권이 정권교체로 포장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야권이 주도하고 차별화할 수 있는 사회경제 영역에서의 핵심 의제를 빼앗는 효과를 거뒀다. 지난달 경향신문의 창간기념 여론조사에서 확인되듯, 국민들은 경제민주화를 가장 잘할 대통령으로 박 후보를 지목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데 박 후보가 입장을 바꾸고 있다. 재벌의 기존 순환출자를 인정하는 등 김종인 국민행복위원장이 제안한 재벌정책의 핵심을 거부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 지주회사 규제 강화 등 재벌개혁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사안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경제5단체장들을 만나서는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고 기업의 목소리를 들어서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재벌개혁은 현행 법적 틀을 통해 불공정거래행위 등 행태 규제를 하는 정도로 축소됐다. 대선 출마 선언에서 밝힌 경제민주화와는 멀어도 한참 멀어진 것이다. 외려 거리는 친재벌과 성장의 ‘줄푸세’의 기조와 훨씬 가까워졌다.


(경향신문DB)


대선 출마 선언 3개월 만에 박 후보는 어떻게 바뀐 것인가. 그간의 경제민주화가 순전히 선거의 마케팅 차원에서 전개된 것일 뿐이지 실제는 ‘줄푸세’가 본색임이 드러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환경 변화에 따른 근본적 입장 전환, 경제민주화 기조를 폐기 또는 변경하는 것일 수 있다. 재계와 보수언론이 이끄는 소위 경제위기론에 조응해 보수층의 표를 결집시키기 위한 선거공학적 대응일 수도 있다. 김종인 국민행복위원장이 지적한 대로 경제민주화를 좌절시키려는 재계의 줄기찬 요청과 압박에 “동화된” 결과일 수도 있겠다.


이제 박 후보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대선 출마 선언에서 국민행복의 길을 열어갈 지상의 과제로 내세운 경제민주화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새누리당의 정강정책에 내건 경제민주화는 폐기하는 것인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한국 경제의 길을 놓고, 경제민주화의 길을 놓고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야의 정당과 후보 사이에 제대로 된 경쟁과 모색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모호한 상징의 구호 속에서 경제민주화의 깃발을 나부끼며 선거에서의 효용만을 기대하고 도모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속임수다. 실제로는 경제민주화를 포기했거나 집권 시 실천의 의사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화려하게 화장한 가짜의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것. 공평과 정의가 지배하는 경제로의 전환을 바라는 “고단하고 불안하고 억울한” 대중의 열망을 이용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대신해서 박 후보에게 묻는다. ‘경제민주화의 박근혜’와 ‘줄푸세의 박근혜’, 어느 쪽이 진짜 얼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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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양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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