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이 이른바 ‘전당대회 효과(convention effect)’를 아직 못보고 있다. 애지중지해온 정동영·김근태의 ‘빅매치’를 성사시켰음에도, 지지율은 그대로다. 불과 47석의 미니 여당이던 시절에 김근태가 빠진 경선을 치르고도 단번에 8%의 지지율을 20% 이상으로 끌어올렸던 2004년 1·11전당대회의 추억, 그것의 재현을 꿈꾼 열린우리당으로서는 당혹스럽고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일 터이다.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바닥의 지지율이라지만, 한자리에 머물던 2004년 벽두 만큼은 아니다. 열린우리당의 덩치는 47석에서 3배 이상 커졌다. 내각 수업을 통해 무게를 키운 정동영, 김근태의 맞짱 대결도 이뤄졌다. 그럼에도 전당대회 흥행은 초라했고, 전당대회 뒤 효과도 초라하다.

그때도, 지금도 주인공은 정동영 의장인데 왜 이럴까. 2004년 1월과 2006년 2월 사이의 간극을 무색케 할 만큼 구태의연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2004년 정의장은 내각 인사의 총선 징발을 앞장서 주도했다. 강금실 법무장관을 놓고는 “완강하게 ‘정치 안하겠다’고 말하지만 꼭 모셔와야 한다”고 했다. 작금에 벌어지는 풍경과 너무도 흡사하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l 출처 : 경향DB



-2년전과 흡사한 ‘현장속으로’-

2004년 정의장은 취임 직후부터 재래시장 방문, 택시기사 간담회 등 왕성한 민생 탐방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속도감에서 그가 내세운 ‘몽골기병론’과 어울렸다. 그리고 2년 뒤 새 정동영 의장 역시 ‘현장 속으로’를 기치로 팔도 사방을 돌고 있다. 서울대 총장을 찾아가고, 광주에서는 무등산에 올라 연을 날렸다. ‘신(新)몽골기병론’이라지만, 과거 몽골기병론의 판박이다.

그리고 2004년 정의장은 “좋은 분들은 낙하산을 타고서라도 부산에 상륙해서 돌파해야 한다. 대구·경북도 마찬가지다”라고 설파했다. 2년 후 다시 당의장이 된 그는 첫 공식일정 행사에서 “독립운동하듯이 대구 돌파를 선언하겠다”고 천명했다. ‘돌파’라는 으스스한 단어까지 같다.

결국 2006년 정의장의 ‘신몽골기병론’에는 새로움(新)이 없다. 2004년의 ‘정동영 효과’는 민생탐방이나 외부 인사 영입 같은 이벤트 외에 다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어찌됐든 정동영으로 표징된 한국정치의 세대교체, 변화와 혁신의 깃발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정동영’의 것이 아니다. 이미 전당대회에서 등장한 40대 기수론, 당권파 책임론 등은 곧 ‘정동영’이 한 기득권이 되었다는 방증이다. 새로움은 없고, 있었던 자산은 잃어버린 마당에서 흘러간 노래로 화려한 과거의 재현을 꿈꾸는 일은 무리이거나 아니면 착각이기 십상이다.

정의장은 언제인가 “지금까지 돌파의 정치를 해왔다고 본다. 민주당 쇄신·정풍 운동,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열린우리당 창당도 이 정동영이가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면이 분명 있었다. 현직 대통령의 면전에서 최측근을 내쳐야 한다고 건의할 때나, 비록 꼴찌지만 완주함으로써 아름다운 경선을 만든 것이나,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할 때나, 그는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눈을 포착하는 데 남다른 감각을 발휘했다. 그것은 정치인으로서 장점이다.

-국민기대 외면 선거지상주의-

현재의 정동영 의장은 그 흐름과 기대를 놓치고 있다. 그에게는 오직 선거 승리지상주의만 어른거린다. 취임 다음날부터 오로지 지방선거 승리, 승리만을 외치며 갖은 선거논란을 주도하고 있다. 양극화 문제는 남북(南北)까지 포함돼 ‘오대양의 바다를 넘자’는 낯선 구호로 휘날리고, 교육양극화가 실업고와 비실업고의 대비로 단순화되는 엉뚱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취임 열흘여, 정의장의 궤적에서는 집권 여당 대표로서 막중한 국정 책임의 소명도, 서민대중의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정책적 비전과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정의장은 전당대회 와중에 ‘열린우리당이 먼저 중심과 정체성을 세워 강해져야 한다’며 소위 선(先)자강론(自强論)을 설파했다. 지금 열린우리당은 진정 자강하고 있는가. 요란한 겉 화장만으로는 자강할 수 없다.

Posted by 양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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