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와 요청

여적 2015. 6. 18. 21:00

요구(要求)와 요청(要請), 한 글자 다른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일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요구는 ‘받아야 할 것을 필요에 의해 달라고 청함’, 요청은 ‘필요한 어떤 일이나 행동을 청함’으로 되어 있다. 사전 풀이의 차이는 ‘받아야 할 것’에만 있다. 요청에 비해 요구가 좀 더 당위성이 있다는 정도의 차이다. 그 당위성 차이 때문에 요구와 요청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느낌이 달라지게 된다.

뻔한 두 단어, 한 글자 차이를 놓고 국회와 여야, 청와대가 실로 눈물겨운 해석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의 요구를 요청으로 바꿔 정부로 이송한 국회법 개정안의 향배를 걸어 놓았기 때문일 터이다.

국어학자나 법학자들도 당혹할 만한 요구와 요청에 대한 정치권의 해석을 한번 보자. “요구와 요청은 호랑이와 고양이처럼 현저히 다른 것이다. 요구는 ‘당연히 내놓으라’는 뜻이고, 요청은 ‘필요하니 좀 내주세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부산만큼 동떨어진 의미이다”(새정치민주연합 이석현 국회부의장), “법적으로 가장 센 표현은 청구(請求), 청구권이다. 요청은 청구의 앞글자를, 요구는 뒤글자를 따온 것이다. 영어로 번역해도 demand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새누리당 김진태 의원).

정의화 국회의장이 11일 오후 국회에서 시계를 보며 집무실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국회법 개정안에서 요구와 요청에 담긴 법적 강제성을 놓고도 해석은 천양지차다. “요구에서 요청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강제성을 거의 없앴다”(정의화 국회의장), “딱 한 글자 고친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강제성 해소로 보기 어렵다”(청와대 관계자).

한 글자 달라진 요구와 요청을 두고 “서울과 부산만큼 동떨어진” 해석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여야가 합의해 요구를 요청으로 바꾼 ‘메시지’를 애써 뒤로한 채 애먼 ‘단어’ 풀이에 매달린 결과다. 거부권 시위를 벌이는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 명분을 주기 위해 국회가 머리를 맞대어 마련한 ‘상징’이 요구에서 요청으로 표현을 누그러뜨린 것이다. 정치적 상징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요구와 요청에 대한 안드로메다식 뜻풀이를 계속하는 것은 국어교육에도 해롭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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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양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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