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증명서

여적 2015. 3. 25. 21:00

그 시절,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 매년 학기 초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하는 일은 고역이자, 감추고 싶은 속살을 까발려야 하는 창피함의 범벅이었다. 누런 종이의 가정환경조사서를 채워나가는 연필은 ‘집안 환경’란에서 한없이 서성댈 수밖에 없었다. 상류·중류·하류층을 구분해 기입하는 것을 시발로 가옥의 소유, 전세, 월세 여부와 함께 방이 몇 칸인지도 적어야 했다. 재산 총액은 물론 월 수입과 저축액까지 써넣어야 했다.

가장 난감한 대목은 동산 소유를 체크하는 리스트다. 흑백TV, 전축, 라디오, 자전거 등의 목록은 시대가 흐르면서 컬러TV,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 등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특정 물건의 있고 없음으로 가난을 확인하는 잔인한 ‘시험’은 가슴에 대못으로 남게 마련이다. 어느 항목에도 동그라미를 그릴 수 없던 아이들은 “컬러TV가 없으면서도 동그라미를 해놓고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떨며 조사서를 내던 기억”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가난 증명서’였던 가정환경조사는 개선을 거듭해 이젠 옛일이 되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왼쪽)와 홍준표 경남지사가 18일 경남 창원시 경남도청에서 무상급에 대해 논의한 뒤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다. _ 연합뉴스


홍준표 경남지사가 무상급식을 중단하고 저소득층 자녀에게만 급식을 지원하는 대신 절감된 급식예산을 서민자녀들의 교육지원에 돌리는 정책을 강행하면서 ‘가난 증명서’가 부활했다. 이제 경남도의 가난한 학생들은 급식비 지원을 받기 위해 소득 하위 25%에 든다는 것을 학교에 ‘증명’해야 한다. 또한 교육비 지원을 받으려면 읍·면·동 사무소에 소득, 예금, 부채 등 무려 20가지에 달하는 증빙 서류를 내야 한다.

학교에서 밥 한 끼를 먹으려면 ‘나는 가난합니다’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셈이다. 결국 밥을 자기 돈을 내고 먹는 집단과 온갖 ‘가난 증명서’를 내고 공짜로 먹는 집단으로 편 가르고, 낙인찍는 세상으로 돌리려는 반동이다. 무상급식을 도입한 데는 ‘밥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도 있다. 예민한 성장기의 아이들은 눈칫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겠다고 말한다.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는 헌법 정신, 국가의 책무를 환기하기 전에 꿈나무인 우리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야만의 교실로 돌아갈 수는 없다. 홍 지사가 ‘교육’을 말하려면, 최소한 아이들의 밥을 갖고 장난치지는 마라.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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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양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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